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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통해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메뉴 중 하나가 ‘국수’인데요. 캔버스처럼 하얀 ‘면’ 위에 ‘지역별 식문화’라는 화가가 그려 나가는 ‘국수’라는 작품. 우리는 국수를 통해 인류의 과거로도, 혹은 미래로도 여행을 떠날 수 있죠. 이 침 고이게 맛있는 미식 여행의 가이드가 되어 줄 ‘이욱정 PD 겸 셰프’를 만났습니다. 



요리를 통해 인간을 탐구하는 이욱정 PD


│3천 년을 살아남은 기묘한 음식 '국수'의 길을 따라가며 제작한 다큐멘터리 <누들로드>


이욱정 PD는 요리를 통해 ‘우리 인간은 누구인가’를 탐구합니다. 2008년 처음 방영된 그의 작품 <누들로드> 역시 면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인류의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웰메이드 작품이었는데요. 인문학적 접근 방식으로 인기를 끌며 2010년에는 중국 국영 CCTV에 ‘면의길’ (미엔타이지루)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고, 이후 일본 NHK를 비롯해 전 세계 30여 개 국에서 방송되며 새로운 푸드멘터리 로드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음식에 대한 그의 애정은 비단 푸드멘터리에만 국한되지 않았는데요. PD 생활 중 프랑스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루’의 최고급과정을 수료하였고, 자신만의 푸드 스튜디오도 오픈했습니다. 그의 식탐은 단순히 맛을 보는 것이 그치지 않는 것이죠.



이욱정 PD에게 듣는 식(食)문화와 국수 이야기


│일본에 최초로 국수를 전달한 승려들. 국수만큼은 '후루룩'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는다.


Q. 음식은 문화인지라 자라온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치는데요. 어렸을 적 어떤 음식 문화가 있는 집이었나요?

할아버님은 평안도 출신이시고, 아버님은 만주에서 태어나셨어요. 그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중국 음식과 이북 음식을 많이 접했죠. 친가 쪽에 가게 되면 만두나 녹두전, 냉면 같은 걸 집에서 꼭 해 먹었어요. 어머님께서는 동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기 때문에 일본 음식을 자주 해주셨습니다. 음식에 대한 추억도 경험도 풍부했던 셈이죠. 그래서인지 저는 어떤 날씨, 분위기, 장소에 따라 떠오르는 음식들이 있을 정도로 식탐이 많습니다.


Q. 요즘 전 세계적으로 면이 주식의 자리를 넘보고 있습니다. 국수의 시작은 어떻게 되나요?

국수의 재료가 되는 ‘밀’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어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밀은 주로 빵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죠. 이후 중국의 영향권에 있었던 ‘신장 위구르우루무치’ 지역으로 밀이 전해지며 국수가 탄생했습니다. 


이처럼, 국수는 ‘빵 문화’를 낳았던 밀이 중원의 ‘탕 문화’를 만나, 끓는 물에 조리하기 적합한 디자인으로 변모한 음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건식의 재료와 습식의 조리법이 조화를 이룬 동서 최고의 합작품이죠.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던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된 국수는 동쪽으로는 중국 본토를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 서쪽으로는 이슬람 국가와 이태리 등 유럽으로 전파되어 이태리에서는 파스타의 기원이 되었어요. 그래서 실크로드를 누들로드라고 부르죠.


│고대 한족이 탕과 찜을 즐겼던 것은 그것에 용이했던 조리도구와 관련이 깊다. 이런 탕 문화는 밀가루와 만나 국수 문화를 발달 시키게 된다.


Q. 푸드멘터리 <누들로드>를 촬영하면서 국수의 역사에 대해 많이 연구하셨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국수 역사는 어떻게 되나요?

한국의 면 역사는 생각보다 짧습니다. 우리나라는 국수의 재료가 되는 ‘밀’ 자체가 귀했죠. 조선 시대에는 더욱이 귀해서 대부분의 국수는 메밀과 녹말로 만들었는데요. 조선왕조 초기 세종대왕은 메밀면을 즐겨 먹었는데, 궁중으로 진공하는 메밀이 부족해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에

205섬을 더 할당시켰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또한 우리는 상업 도시가 발달한 나라가 아니었어요. 국수가 성장하는 원인으로는 ‘상업도시’와 ‘외식의 탄생’을 꼽습니다. 레스토랑 문화가 확산되면서 국수 문화도 퍼지는 거죠. 이는 국수라는 것이 실은 ‘도시의 라이프스타일’에 아주 적합하기 때문인데요. 국수는 빨리 만들고 빨리 먹을 수 있고, 그에 반해 집에서 만들어 먹기는 다소 어렵죠. 이런 양가적인 특성이 상업 도시의 외식 문화와 잘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그러한 상업도시가 발달한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제의 발전 속도처럼 우리나라 면 문화의 발전 속도는 가히 놀라운 수준이에요. 2014년 조사 결과 한국의 면(noodle) 소비량이 일 인당 9.7kg로 세계 1위입니다. 이젠 어떤 지역을 가든 향토 국수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면 요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죠.


Q. 그렇다면 우리나라만의 면 문화도 있나요?

냉면은 아주 독특한 국수예요. 글루틴이 없는 메밀로 국수 면을 만드는 게 사실 무척 힘든 일이거든요.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메밀로 면을 만들어 먹었지만, 그쪽은 밀이 풍부했기에 저희처럼 성행하진 않았어요. 더욱이 메밀 면을 아주 차가운 국물에 말아 먹는 건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겁니다.


Q. 나라별, 지역별로 사람들이 즐겨 먹는 국수에 따라 지역의 특성도 알 수 있나요?

면은 하얀 캔버스와 같아요. 하얀 면에 지역의 식문화가 더해져 새로운 색을 띠게 되죠. 캔버스에 어떤 그림을 그릴지 전적으로 화가의 손에 달렸듯, 면도 어떤 지역의 식문화를 만나느냐에 따라 재창조됩니다.


가령 일본에는 다시마나 다랑어포의 국물을 내서 먹는 면 요리가 있고, 동남아시아에 가면 코코넛 밀크를 사용한 면 요리가 있습니다. 그 지역의 식문화가 반영된 것이죠. 한국도 마찬가지예요. 김치 즉, 동치미 육수로 평양냉면을 만들죠.


│국수는 반죽 그대로를 면으로 뽑은 '생면'과 수분을 건조한 '건면'으로 나뉜다. 건면을 기름에 튀기면 라면과 같은 '유탕면'이 된다.


Q. 언젠가 인터뷰에서 전통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 등 구변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고 하셨어요. 지금 국수는 어떤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나요? 

예전에는 보통 점심에 면 요리를 즐겼지만 지금은 아침, 저녁 가리지 않고 먹고 있는 거 같아요. 쌀 소비는 줄고 있지만 면을 포함한 밀가루 소비는 한정 없이 늘고 있죠. 인스턴트 라면도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고요.


하지만 인스턴트 라면 시장은 한계에 도달해 있어요. 때문에 카테고리를 늘리면서 선택지를 주어 개개인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죠. 이제 사람들은 쌀국수, 팟타이, 파스타 등 다채로운 면 요리를 적극적으로 즐깁니다. 간편함뿐 아니라 다양한 즐거움까지 추구하고 있는 것이죠.


Q. 푸드멘터리의 본질은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하셨는데요. 국수는 우리의 어떤 점을 닮았나요? 

‘재미를 추구한다’, ‘호기심이 많다’는 호모 사피엔스의 특성을 닮은 게 아닐까 싶어요. 국수만큼 특이한 형태의 음식은 없거든요. 대부분의 음식들은 자연 그대로의 형태에요. 밥과 생선구이를 떠올려보세요. 요리 후에도 기존의 형태를 지키는 편이죠. 국수는 그런 면에서 기묘한 음식이에요. 원재료에서 멀어진 식감과 형태로 호기심을 자극하고 상상력을 실험하게 만들죠. 


이제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단계는 지났습니다. 재미있으면서도 요즘 사람들이 원하는 속도감까지 갖춘 음식이 바로 국수에요. 그 덕에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급속하게 면의 소비량이 늘고 있는 거겠죠.


Q. 조금은 사적인 마지막 질문이에요. 가장 애정하는 한국의 면 요리는 무엇인가요? 

저는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 은은히 풍겨오는 메밀 향을 좋아해요. 만드는 데는 어떤 면 요리보다 공력이 들어가지만 그걸 대 놓고 티 내지 않아요. 육수 맛 역시 어느 것 하나 도드라지지 않고 묵직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국수 위로 올라가는 고명이나 음식을 차리는 방식 역시 화려하기보다는 단아하죠. 한국의 다른 전통문화에서 느껴지는 그 단아한 매력이 평양냉면 한 그릇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덤덤한 매력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가 없죠.


│이욱정 PD 겸 셰프


 

본 포스팅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련된 감각으로 소개하는

한류 문화 매거진 '韩悦(한웨)'에서 발췌했습니다.